하운 김남열의“후회 없는 삶을 살았구나 판단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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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삶을 살았구나
판단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후회 할 일 들이 많다. 나로 인한 것이든, 타인으로 인한 것이든 내가 후회를 하거나 타인으로 하여금 후회를 남기게 만드는 삶을 산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자기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아쉬움의 후회는 누구든지 있다.
그러나 후회는 빨리 해도 늦다.
살면서 우리가 후회 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어떤 것에 비중을 많이 두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후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희생으로 죽음을 불사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숭고하다” 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후회라는 것은 순간적이든 장기적이든 자발적인 자기의 행동으로 선택해야 할 ‘무엇인가를 못 했을 때’ ‘해야 될 일을 성취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심리적인 반응이다. 그것은 극히 ‘자기애’적이다. 그러나 ‘타자애’ 적인 희생이 동반 된 행위에서는 후회는 없다고 본다. 단지 조금 더 사랑을 베풀지 못함에 대한 부족한 아쉬움이지 그것을 우리는 후회스럽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희생이 동반된 행동은 후회할 겨를도 없을 뿐더러 후회할 본인도 없다.
‘그 사람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았구나.’ 라며 그 판단을 가름 하는 것은 살아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매스컴을 통해서 알려진바 일본인의 가슴을 울린 젊은 20 대의 청년 이수현 씨에 대한 얘기이다. 도쿄 전철역에서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가 목숨을 잃었다.
외국 청년의 희생에 많은 일본인들이 들 먹였다. 그의 영결식에는 총리는 물론이요 고위관리들이 참석하여 명복을 빌었으며 신문은 대서특필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부산에서는 조희권 씨라는 40대 남자가 불이 난 고층 아파트에서 여섯 살짜리 딸을 안고 뛰어내려서나 딸은 구하고 본인은 목숨을 잃었다.
다른 생명을 구하려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은 것은 똑 같은데 이 두 사건에 대해서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우선 신문의 기사 내용 자체만 보더라도 이수현 씨의 경우는 크게 보도 된 반면 조희권 씨의 희생은 아주 미약하게 알려 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생물학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라고 볼 수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 ‘남’은 이수현 씨 경우는 생물학적으로 볼 때 완전한 ‘남’이지만, 조희권 씨 경우에는 유전자를 공유하는 ‘친 딸’ 이라는 것이다.
혈연선택이론血緣選擇理論(친족 선택은 자연 선택에 의한 생물의 진화를 볼 때 개체가 스스로 남긴 자손의 수뿐만 아니라 유전자를 공유하는 혈연자의 번식 성공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는 진화 생물학의 이론이다. 이에 따라 혈연 개체에 대한 이타 행동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다. 혈연 선택설이라고도 한다.)으로 보면 유전적으로 가까운 가족이나 친족에 대한 희생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가까운 친척이 아닌 ‘완전한 남’이었을 경우에는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라고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보기에 그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는 것이다. 함께 철로에 뛰어 들어 목숨을 잃은 일본인 희생 역시 이수현 씨의 죽음에 가려지고 만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가 있다.
둘의 희생 중 조희권 씨와 한 일본인의 죽음이 덜 값지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충격이 다를 뿐이라는 사실이다.
값진 희생! 거룩한 죽음 앞에서 인간은 숙연해진다.
그 숭고한 모습을 보고서 인간은 느낀다. “나라면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스스로 물어 보기도 한다. 후회는 스스로가 하지만, 후회 없는 삶을 살았구나. 판단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껴본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유는 많은 행복을 제공하고 있다. 자유로운 시간 속에 사람들의 행동으로 성취하는 것도 많지만 후회스러움도 가진다. 구속과 억압 속에서는 후회가 남지 않는다. 왜냐하면 후회스러움보다 지우고 싶은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 자유는 사람들이 다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제공되는 시간이 아니며,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대이기도 하기에 오로지 창의적이고 이기적 행동이 배제된 행위를 할 때 후회의 범위는 줄 어 들 것이며, 살아 있는 자의 판단도 “살아 있느니 죽는 게 났다”는 식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후회란 빨리하더라도 늦다.
그렇다면 침대에 누워 “신이여,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온 힘을 다해 살겠습니다” 하며 애원만 하다가 갈 것인가? “땀 흘리면서 제대로 살자”고 생각하며, 단순히 먹고 사는 것만이 아닌 멋진 삶을 살자 그래서 만족스럽고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가자고 마음을 다잡아 갈 것인가? 지금이라도 자문자답自問自答 하며 후회 없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기애’가 배제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시간을 좀 더 ‘타자애’를 위한 곳으로 활해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 글/하운 김남열(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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